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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변선영 가치없는 것의 가치

변선영 작가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크랜브룩 아트스쿨에서 공부한 후 현지에서 미술을 강의했다. 뉴욕, 베를린, 런던,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수십 회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한국민속촌미술관, OCI 미술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우개로 쓱쓱 지운다. 가위로 오려낸 듯 도려내니 새하얀 공백의 꽃이 피어오른다. 지워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공중에 유영하며 살아난다. 그 뒤로는 무굴제국의 세밀화를 닮은 작은 조각들이 퍼즐처럼 엉겨 있다. 변선영 작가는 그렇게 그림을 ‘짓는다’. 작은 조각 퍼즐 맞추듯, 불온전해 보이는 구상의 조합을 불균형한 듯 조형적 구도로 조각한다. “살기 위해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약을 짓고, 때에 따라 죄를 짓기도 한다. 짓는다는 것은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일구고 생성한다는 의미다”라고 작가 노트에 썼듯이 그는 주도적으로 그림을 짓는다. <행복> 5월호 표지 작품인 ‘1´2´3´4´5´6´7´ and value’(85×12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는 그렇게 피어났다. 피사체라 명명하는 대상을 과감하게 지우고 그 주변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변선영 작가가 말하는 ‘가치의 전복’이다.

“쓸모없는 것, 가치 없는 존재, 정물화를 그리면 은근슬쩍 지워버리던 정물 너머의 벽에 어떻게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고정된 불변의 벽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림 안에서 배경이 부유하듯 떠다니면서 보다 개별적 개체로 살아나죠. 벽의 패턴을 강조하면서 설명적인 대상은 드러냈어요.” 변선영 작가가 이른바 ‘가치 없는 것’이라는 화두에 몰두한 이유는 뭘까? 미국 유학 후 전업 작가와 강사로 일하던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때는 1999년이었다. IMF 외환 위기 시절이었고, 모두 주머니가 가벼웠다. 이미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작가는 한국에서 ‘스위트 홈sweet home’이라는 개념이 가정이 아닌 건물 또는 재산과 소유의 개념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질문으로 선보인 전시가 2002년에 인화랑에서 열린 다. 당시 그는 핑크색 풍선 집을 못 위에 매다는 설치 작업을 전시했는데, 그가 생각해온 가치의 전복을 개념적으로 선보인 적극적 행위였다. 2004년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린 <그림 속의 집, 집 속의 그림> 그리고 지난해에 선보인 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가치와 그 정체성에 관한 화두는 이어져왔다.


“그림에 등장하는 동서양의 그림도 혼성된 가치의 개념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서양 명화가 달력 그림으로 둔갑하거나 우리 고유의 민화를 액자 속에 넣는 구성 역시 우리에게 박혀 있는 가치의 개념을 전도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죠. 달력에는 의도적으로 숫자를 제거해 달력의 기능적 역할을 없애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도를 이해하고 작품을 보면 퍼즐 같은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가장 궁금한 건 제목이다. 이해할 수 없는 숫자의 나열과 기호의 조합으로 이뤄진 제목은 아무리 추리를 거듭해도 알 수 없는 것.

“<행복> 표지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1부터 7까지의 숫자는 작품 속에 있는 정물의 개수입니다. 그리고 숫자 옆에 붙은 기호는 일종의 복제를 뜻하는 것으로, 똑같은 형태로 투영된 정물을 상징합니다.” 실제 작품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같은 형태의 그림이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마치 그림자처럼 어디라도 따라붙을 것 같다. 안팎을 모호하게 만들어 그 경계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는 것. 변선영 작가의 화두인 가치의 전복과도 일맥상통한다. 또 그의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점묘법이라는 화법 때문이다. 그는 펜을 꼿꼿이 세워 한 점 한 점 세밀하게 찍어내는 핀 작업의 반복을 통해 배경의 패턴을 완성한다. 날카로운 펜의 각을 90도로 세워 오차 없이 찍어내는 행위는 거의 오체투지와도 흡사하다. “온몸을 수그리고 작업을 해야 하는 탓에 허리가 멀쩡할 새가 없어요. 전시를 앞두고선 거의 종일 작업하는데, 그땐 정신과 육체의 소모가 굉장합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행위와 비슷해요. 신을 경배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하는 의식처럼요.”

변선영 작가의 질문은 여전히 쓸모없음의 쓸모다. 기업과 함께하는 프로젝트전시가 끝나면 2016년 개인전을 목표로 같은 작업에 몰두할 계획. 가치의 혼용이 비일비재한 우리 사회에서, 진짜를 구별하는 심미안을 가질 수 있기를, 그렇게 가치 없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기를!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