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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노은님 “나는 구제된 사람입니다”

‘물고기의 꽃밭’, 종이에 아크릴 채색, 785×585mm
오리 하나 나무 하나 돌멩이 하나가 점이 되어 알알이 박힌 옷을 입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하는 서양화가 노은님. 제18회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 수상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시차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제주 여행을 마치고 막 올라와 조금은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듯한 평온함과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만난 동식물은 그가 입는 옷, 휴대폰, 지갑 등에 유랑하고 있었다. 평소 “작가 자신이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듯이 붓이 닿는 모든 대상이 캔버스가 되어 그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과 참 많이도 닮았다. 그 옆에는 반려자 게르하르트 바치가 그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 에스코트했다. 편안한 의자가 눈에 보이지 않자 자신의 허벅지에 잠시 앉으라는 농을 할 만큼 여전히 애정을 드러내는 인생의 짝꿍. 노은님의 작품이 언제나 평온하고 말간 위로를 주는 것은 나무처럼, 바위처럼 언제나 든든하게 인생의 바람을 막아주는 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몸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화가 노은님은 18년째 독일 남부 깊은 산골 미헬슈타트의 고성에서 산다. 1200년대에 지은 고성은 녹음이 짙은 숲과 개울로 둘러싸여 있다. 작가는 “집 보여드릴까요?” 하며 태블릿 PC를 꺼내 사진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가을에 직접 딴 버섯 사진도 있다. “아는 것만 먹어요. 발 닿는 데에 넘치니까. 아침에는 사슴이 제 새끼 데리고 이파리를 뜯어 먹고, 저녁에는 여우가 숨어 달려요. 개울이 집의 담을 따라 흐르는데, 창문 너머로 음식을 휙 던지면 팔뚝만 한 숭어가 달려들어 탁탁 받아먹어요. 여름엔 이렇게 큰 가재가 냄새를 맡고 와요. 해가 물에 비치면 다 보이거든. 항상 돌 옆에 있어요. 빨리 숨으려고. 먹이를 탁 던져주는데, 저쪽에서 숭어가 보고 뱅 돌아와서 홱 낚아채요. 가재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 그런 걸 관찰하면서 사는 것 같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노은님 화가는 집 주변에서 마주하는 자연을 이야기할 때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한 해의 3분의 1은 떠도는 삶을 사는 여행자이기도 한 그는 생애 잊을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한 순간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몰디브는 여섯 번 갔는데, 신이 만든 창조물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 신비로움에 취해 바닷속을 더 들여다보려고 하면 파도가 못 들어오게 막 밀어내요.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창조주가 쉽게 볼 수 없도록 숨기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바다 수평선 너머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데, 마치 바다와 해가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함께 잠자리에 들러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그렇게 대자연과 마주할 때 자신이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한없이 넓은 우주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깨닫고 겸손해진다. 그런 경험 때문일까? 사람들이 그에게 향수병(하임베heimweh)에 대해 물으면, 그는 그 대신 페른베fernweh, 즉 먼 곳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연을 유랑하며 오감으로 경험한 것이 그의 붓끝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표지 작품 ‘나비와 함께’(종이에 아크릴 채색, 2009)도 마찬가지다. “정원에 노랑나비가 많이 오거든요. 붓 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정원에서 본 노랑나비도 나오고, 오리도 나오고, 물고기도 나오고…. 김치만 먹으면 몸 밖으로 김치밖에 나올 게 없잖아, 그쵸? 내가 보고 느낀 것만 그림으로 소화되어 나와요.”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화가 노은님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홀로 그림을 그렸다. 간호장의 주선으로 전시회를 연 것을 인연으로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입학, 주경야독하며 그림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이후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전시를 열었고, 백남준ㆍ요셉 보이스 등의 예술가와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지난 3월 ‘제18회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을 수상했으며, 5월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오로지 감사하며 살 뿐

스스로 “그림을 만나기 전에는 꼭 벌받는 사람처럼 살았다”고 말하지만, 강물이 흐르듯 해가 뜨고 지듯 마치 그 길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그의 인생은 흘러갔다. “제가 스스로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인데,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됐고, 좋은 상까지 받게 되었네요.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다가 기적같이 살아난 사건이 두번 있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있어요. 저는 항상 구제되었다는 것이죠. 뭔가 든든한 백이 있는 것 같아요. 부처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마라, 넌 항상 구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감사하는 마음만 생겼어요. 여태까지 온 삶이 그래요.” 그는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 수상 소감에서도 같은 마음을 전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항상 구제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두 발이 길다면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고, 제 두 팔이 길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이는 삶을 대하는 그의 방식이자 작품의 근원적 에너지이며, 만물을 향한 진솔한 고백이다.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