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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백지혜 자연의 색에 가까이, 나에게 더 가까이
백지혜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과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 전통진채화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통진채화를 공부하며 재료에 대해 세밀하게 공부했고, 현재는 자연 염료를 사용해 비단 그림을 그린다. 2002년 첫 번째 개인전 <내 작은 이야기> 이후 여덟 번의 개인전과 수차례의 단체전을 개최했다. 출간 서적으로는 <꽃이 핀다>(보림), <밭의 노래>(샘터)가 있다.

‘봄눈’, 비단에 채색, 74×132cm, 2010
백지혜 작가의 그림을 처음 본건 2007년 펴낸 그림책 <꽃이 핀다> 에서였다. 판형 가득 채워진 꽃 그림 안에는 ‘꽃빛’이 있었다. 빨강 동백꽃, 노랑 민들레, 분홍 진달래, 자주 모란꽃, 연두 버들잎, 파랑 달개비꽃, 초록 대나무 등 열세 가지 색깔은 자연에 가장 가까워 보였다. 흙과 바람, 이슬과 태양의 기운이 듬뿍 박힌 아름다움 자체.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자연에서 나온 염료와 배채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배채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많이 사용한 전통 화법으로, 화폭인 비단의 뒷면을 채색해 그 빛이 자작하게 스미면 앞면에 다시 세밀한 붓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배채를 낯설어하는 기자에게 작가는 자수틀처럼 비단을 팽팽하게 당겨 캔버스로 만든 틀을 보여줬다. “천이기 때문에 그 상태로 그림 못 그려요. 화폭이 커질수록 천이 느슨해지기에 균형 있게 잡아당기는 힘이 중요하죠. 비단을 균일하게 틀에 고정한 다음, 아교와 소량의 백반, 물을 섞은 교반수를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일고여덟 번 반복합니다. 일종의 코팅인 셈인데, 익숙해지기까지 참 고된 과정이에요. 비단에 색이 그대로 얹히기 때문에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고, 깊이가 살아 있죠.” 큰 화폭에 작업할 때는 무릎을 바닥에 꿇고 허리를 굽혀 아교칠을 하기 때문에 노동이 동반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추위를 견디는 나무처럼 한국 정서의 색채를 내기 위해 그는 그렇게 온몸으로 수행하는 과정을 견딘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분홍
표지 작품 ‘진달래’는 그렇게 탄생한 비단 그림이다. 날개를 활짝 편 진달래 꽃잎과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 꽃술이 고운 분홍빛을 발산하며 봄을 만끽하는 우아한 자태. 백지혜 작가는 우리의 색을 자연의 꽃으로 보여주는 그림책 <꽃이 핀다>에서 진달래의 ‘분홍’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분홍은 벚꽃처럼 엷은 연분홍부터 작약처럼 짙은 진분홍까지 여러 가지예요. 원래 ‘홍색’은 오간색의 하나로 빨강과 하양의 중간색인데, 홍색이 짙으면 진홍, 산뜻하고 밝으면 선홍, 흰색이 많이 섞이면 분홍입니다. 오간색이란 오정색들 사이의 중간색으로 홍색, 벽색, 녹색, 자색, 유황색, 다섯 가지가 있어요. 진달래는 산기슭에서 많이 자라는 떨기나무로 봄에 분홍 꽃이 피어요. 원래는 흰 꽃이었는데 두견새가 밤새워 울다 토한 피에 물들어 분홍색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어요. 먹을 수 있는 꽃이라고 해서 참꽃이라고도 불러요.

화전이나 화채를 만들어 먹고 술을 담그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길에서 흔하게 보는 것이 진달래인데,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은 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백지혜 작가 역시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진달래를 별로 살펴보지 않았다고. “사실 진달래는 마당에서 가장 애정이 가지 않은 꽃이었어요.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그리는 대상을 오래 곁에 두고 관찰하는데,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진달래의 평범한 아름다움과 그 안의 생명력을 발견하게 된 거죠.”

‘나들이’, 비단에 채색, 37×45.5cm, 2007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갓 태어난 생명을 경배하듯,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듯 그는 그림의 대상을 곁에 두고 관찰하는 것을 선행한다. 그 모든 형태를 오롯이 인식했을 때 그 정서가 주는 색과 머리카락 한 올의 흩날림같은 세밀한 작업까지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가 시를 쓰고, 백지혜 작가가 그림을 그린 <밭의 노래>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지, 감자꽃, 상추, 쑥갓 등을 그리기 위해 풀무학교의 텃밭을 수차례 방문 취재했다.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소녀’ 역시 한나절 이상 흙에서 함께 놀고 노래하는 시간을 보낸 후에 그린 그림들. 그 소녀는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투영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기억의 끝을 붙잡고…
“담벼락 너머로 피어난 꽃을 보며 설레던 마음, 봄날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보며 아쉬웠던 기억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일 수 있는 것들이 저에게는 영원히 남기고 싶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2010년 <소소한 기억> 전시 노트에 쓴 작가의 말처럼 그는 어린 시절의 소소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봄기운에 설레는 소녀, 마당에 핀 꽃, 골목길 담장 풍경 등 매일 보는 일상의 풍경을 그린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좋은 추억들, 소소하지만 벅차던 행복들, 그런 모습에서 좋은 에너지를 얻습니다.” 기억 속 찰나의 설렘과 다정한 추억을 떠올리는 그림, 화폭 너머로 그 기억이 이어지는 그림, 언제나 옆에 두고 보고 싶은 그림, 백지혜 작가의 그림이 딱 그렇다.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