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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선형 실경이 아닌 감정을 투영한 자연

김선형 작가는 홍익대학교 동양학과와 동 대학원 동양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국립경인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8년 서울 청남미술관에서 연 전시를 시작으로 해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꾸준히 열었다. 올해 1월에는 웅갤러리에서 목단을 주제로 한 특별한 세화 전시로 관객을 만났다. 5월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50번째 개인전을 연다. 표지 ‘부귀청화’, 한지에 수묵 채색, 48×26cm, 2013


늦겨울의 해 질 녘 구례 화엄사. 우연히 들른 그곳에서 법고 소리가 울렸다. 하루의 경계를 뜻하는 소리가 역동적이고 격동적으로 지리산 산천을 뚫고 번져나갔다. 마침 고개를 돌려 본 서녘에는 산 그림자와 숲이 검은 실루엣 속에 몸을 숨기는 중이었다. 밤이 오기 전 한껏 드러난 강렬한 파란색 하늘 아래 번지는, 흐릿한 검정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대조. 이윽고 맞은편 범종각에서는 낮과 밤의 경계를 닫는 범종이 울려 퍼졌다. 정, 정, 정. 순간, 검은색과 파란색의 정적인 풍경 위로 소설같이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검정과 파랑 위로 솟구치는 움직임, 그것은 무언가의 태동이었고 새 세상이 열리는 듯한 전율이었다.

김선형 작가는 2006년 구례 화엄사에서 본 이 해 질 녘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작업실에 돌아와 그림을 그리려는데 저도 모르게 파란 물감을 섞고 있더군요. 그 후로 파란색에 대한 신앙이 생겼어요. 그날은 저녁 풍경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밤이 지나 아침이 올 때도 파란색으로 물듭니다. 시작에서 끝으로 갈 때도 파란색, 끝에서 시작으로 올 때에도 파란색이 번지는 것이지요. 파란색은 경계의 색이었어요.” 본디 와인 컬러 같은 진한 붉은빛을 좋아했지만, 화엄사에서의 경험 이후 2007년부터 파란색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아우르는 큰 제목도 ‘가든 블루’ 다. 주조색은 바뀌었지만 작업의 대주제는 여전히 자연이다. 자연이 풍경, 즉 실경을 보이는 작업이 아니라 일차적 풍경 뒤 사람이 해석한 ‘자연에 대한 이차적 감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번짐으로 해석된 자연

“자연에서 느끼는 감정, 즉 자연이 품은 좋은 면, 나쁜 면, 기운찬 면, 우울한 면 등을 내 나름대로 풀어낸 자연입니다. 그렇다고 추상은 아니에요. 구상이지요. 형태가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떨 땐 자연이 무섭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조차 자연의 성정이다. 그런 자연을 그냥 놔두는 것, 유기적 생태계를 형성하도록 두는 것, 살 것은 살고 없어질 것은 없어지게 하는 것, 인적 통제를 하지 않은 자연을 그린다. 그러니 그의 작품 속 자연은 돌발적이고 우연적이다. 선묘 처리 위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만든 후 스퀴즈로 밀어내며 코발트와 세피아, 감청색의 푸른빛이 번져가고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리듬이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관객은 마치 푸른 숲에 들어온 듯한 생기와 청량감마저 느낀다.

“전공이 동양화이니 현대적 작품을 시도하는 중에도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이 물과 종이지요. 동양화의 정체성은 ‘스며듦’입니다. 유화처럼 켜켜이 쌓이는 과정 대신 종이에 물과 먹이 스며들어 마침내 종이와 먹이 같은 질료가 됩니다. 이런 동양화의 미학이 제게 아주 강하게 새겨져 있어요.” 동양화의 스며듦이 푸른색과 만나니 스며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청화백자의 푸른빛이 보였다. 순백보다 우윳빛에 가까운 한지에 푸른색이 얹힌 모습이 마치 청화백자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작품에 ‘가든 블루’ 외에도 ‘청화靑華’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푸른 꽃은 현상학적 꽃 형태보다는 꽃의 정신을 일컫는데 그림을 그린 후 표면에 그로스 바니시 처리를 해 백자 같은 느낌을 냈다.

부귀청화를 꿈꾸다
이렇듯 자연, 청화, 백자의 모티프를 오가다 보니 민화가 작가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래서 심심할 때 모작하던 민화를,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던 민화를 푸른색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민화를 푸른색 모노크롬으로 그리니 느낌이 달랐어요. 올 초에 연 <부귀청화>전은 푸른색의 민화 전시회였어요. 세화歲의 주요 소재인 목단을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했지요. 목단은 부귀영화를 상징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든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부귀인데, 시작이자 끝점을 푸른색으로 사용해 단순히 부귀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철학을 풀어내고 싶었지요.”

김선형 작가가 꿈꾸는 부귀는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어서 잘사는 게 부귀라지만 그에게 부귀는 ‘걱정이 없는 삶’이다. 아침에 일어나 큰 걱정 없고 잠자기 전에도 걱정 없고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 사회에 대해서도 큰 걱정이 없으면 그것이 곧 부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현실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큰 걱정을 사서 하지 않으면 그게 곧 행복이다. “자연과 정원은 꾸준히 그리겠지요. 하지만 푸른색을 견지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계획적 모듈 안에서 그릴 때 그림의 매력은 소멸되니까요.” 열려 있는 가능성에 유기적으로 대처하면 뜻하지 않은 변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이 곧 끝이 되고 끝이 곧 시작이 되는 푸른색처럼 내 안의 가능성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풀어나갈 수 있는 삶, 김선형 작가에겐 그게 곧 부귀청화요 행복의 경계다.

 

글 김민정 수석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