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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일러스트레이터 김진이 씨 종이에 스미는 그림


문자도文字圖란 글자의 의미와 관계 있는 고사나 설화 등의 내용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자획字畵 속에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하는 그림이다. 18세기 후반에 시작해 19세기에 민화와 함께 유행했는데, 주로 병풍 그림으
로 그려졌다. 꽃글씨라고도 불린 문자도는 한자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형예술로 한자의 의미와 조형성을 함께 드러내면서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다. “문자도를 처음 그린 것은 한 사보에 들어가는 그림 때
문이었어요. 텍스트가 길고 여러 가지를 나타내야 했는데, 디렉터가 ‘이렇게 한번 해보실래요?’ 하고 제안을 해주신 게 도움이 됐어요.” 전통적으로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의 여덟 글자만 변주해서 그리
는 문자도를 좀 더 확대해서 다양한 의미를 담은 문자도를 그렸다.

“이번에는 계사년癸巳年을 맞아 복福 자에 뱀을 넣었습니다. 특히 계癸는 오행으로 물(水)인데, 물은 밤을 의미하다 보니 색으로는 검은색이고 결국 ‘흑뱀’의 해가 된다는군요. 그래서 검은 뱀을 그려 넣었어요.” 검은 뱀
과 함께 그려 넣은 모란은 문자도에서 흔히 ‘부귀’를 상징한다. 풍성한 꽃이 피었다 지면 아래쪽의 그루터기가 남는데, 다음 해에 또다시 꽃을 맺는다. 가늘고 약해 보이는 꽃대가 커다란 꽃송이를 지탱하는 것도 모란의 특징이다. 구름은 초월을 의미하면서 상서로운 느낌을 주고, 뱀 아래에 그린 바위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불로초를 그려 넣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진이 작가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일을 시작했다. “친구의 아는 분이 함께 작업실을 쓰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해주셨어요. 본격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할 수 있는 이인수 씨지요. 함께 작업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재밌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텍스트나 주어진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
는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순수 회화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재해석해서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과정, 과장해서 설명하는 작업에 매력을 느꼈다. 물론 모든 작업은 동양화를 기본으로 한다. 한지 위에 얹힌 그림들은 한지의 결 사이로 흐르고 묻힌다. 옅음과 진함이 있고 뭉침과 번짐이 있다. 아무리 까만 먹을 100% 농도로 칠해도 한지의 느낌이 보인다. 스며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표현하는 게 동양화다. 양지가 물감을 종이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면 한지는 물감을 올리면 쑥 빨아들여 순간적으로 종이와 섞인다. 동양화적的이다. “동양화에도 채색화에서 쓰는 기법은 있어요. 물감을 아교에 개서 계속 올리면서 쌓지요. 그 전에 한지에 물감이 흡수되지 못하도록 물이 스며들지 않게 ‘반수礬水(아교와 명반을 넣고 끓인 다음, 물을 넣어 식힌 용액이다. 종이의 표면에 엷은 막을 만들어준다)’라는 과정을 거치고요. 아주 번거롭지요.”


김진이 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학과를 졸업했다. 웅진 <자연은> 음료 패키지 일러스트,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PPP 안내 책자,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옥외 홍보물 등의 작업을 했고, 단행본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 <중국차 이야기>, 아동용 도서 <매호의 옷감>, <초대받은 아이들>등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김진이 작가의 그림은 동양화의 그것처럼 간결하고 살아 있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보는 이에게 열려 있는 선들이다. 소박하고 정감이 있다. “옛날에 포도나 꽃 같은 걸 그리던 문인화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에요. 그
런데 과연 이렇게 한지에 동양화 물감을 써서 요즘 사람을 그려서 남기는 게 이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림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린이를 위한 책을 작업하면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어른이 돼서 본 그림과 어려서 본 그림의 느낌은 아주 다르거든요. 제 자신만 해도 어려서 본 동화책에서 강렬하게 본 것들은 아직도 잊지 않고 남아 있는데, 누
군가가 내 그림을 보고 그 기억을 평생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더 연습하고 공부해서 그려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지요.”

텍스트를 읽고 상상을 통해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한편, 고증이 필요한 부분은 일주일씩 혹은 몇 달에 걸쳐서 자료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의 수고로움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
한 것은 일러스트레이션의 목적에 맞는 그림을 책임감 있게 완성하는 일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전시를 한다면 타이틀을 꼭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쓰겠다는 오기 같은 게 있어요. 순수 회화가 차원이 높
고, 일러스트레이션은 차원이 낮은 것이 아니거든요.”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단지 일러스트레이션이 좋을 뿐이다.

글 이은석 기자 | 사진 김동오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