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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오관진 씨 나와 너의 경계는 엄연하지만 함께 만나 사랑하고 한몸이 되듯이
숲에 물기가 도는 오후 4시 무렵, 박수근의 납작 지붕 그림처럼 야트막한 산에 안긴 납작한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누웠으면 참 좋겠다. 풀과 벌레와 공기가 뒤섞인 봄의 냄새가 훅 끼쳐 오고, 뻐꾸기는 비현실적으로 청명하게 울고. 눈물 그렁해지는 졸음을 즐기며 이 그림 아래 다듬잇돌 베고 누워 있고 싶다.
4월호 표지 작품인 ‘비움과 채움’은 이렇게 서정의 미 가득한 그림이다. 군더더기 없는 단아한 형상들, 맑은 색채, 그림을 떠도는 사색의 기운 때문이다. 그런데 좀 자세히 들여다보니 파격이 보인다. 토마토 열매 하나하나, 도자기 그릇, 나무판이 모두 따로따로의 조각인 그림이다. 그 조각들이 한지 바탕 위에 퍼즐 맞추듯 끼워져 있다. “한지 바탕에서 그릇이 들어갈 자리, 나무판이 들어갈 자리, 토마토가 올라갈 자리를 조각하듯이 칼로 파내는 거죠. 그 홈과 똑같은 크기로 토마토, 그릇, 나무판을 그리고 파낸 그 홈에 짜 맞추듯 끼우면 작품이 완성됩니다.” 그 날카로운 테두리 선의 맛은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이 ‘짜 맞춤’은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달항아리가 놓인 탁자는 바탕을 파내고 그 안에 진짜 나무를 끼워 넣은 것이고, 공중에 뜬 막사발도 따로 그린 그림을 바탕에 끼운 것이다. 우리 도자기의 상감기법(금속이나 도자기 따위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따위를 박아 넣는 기법)과 비슷하다. 게다가 달항아리, 막사발, 분청사기 그림은 진짜 유약을 바른 듯 반짝이고(돌가루와 안료를 혼합해 그리고 코팅 처리한다), 도자기 표면의 갈라진 틈새까지 보인다. 흙과 유약과 나무가 뜨거운 불 속에서 혈투를 벌이다 만들어낸 균열, 유약의 흘러내림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 그리기까지, 아니 이렇게 만들기까지 그야말로 고초의 시간이었어요. 한지가 숨을 쉬는 소재이기 때문에 짜 맞춘 후 마르고 나면 틈이 벌어지거나 뒤틀리곤 했죠. 그 노하우를 알아내는 데 한세월, 똑같은 크기로 잘라내는 데 한세월, 또 평면처럼 보이게 끼워 넣는 데 한세월…. 그냥 평면 위에 일필휘지로 그리면 되지 뭐하러 이 짓을 하나 싶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르고, 끼워 넣는 데 몰두하다 보면 시간도 초월하고 내 미망도 초월해 있죠. 이 작업이 내게 수련의 시간이겠다 싶어서 이제 기쁘게 합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투명한 말들이, 마음들이 그의 중심에 고요하고 격렬히 쌓이는 걸 느낀다.

최근 그의 작품 제목이 ‘비움과 채움’으로 여일한 이유가 있다. 그는 ‘파내고(비움)’ ‘끼워 넣는(채움)’ 작업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채우는 이치를 깨달았다. “내가 큰 그릇이 되는 것에만 눈을 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가 중요함을 이제야 안다. 담기 위해선 그 전에 그릇을 비워야 한다.” 그가 쓴 전시 서문에 그 마음이 불도장처럼 찍혀 있다. 그는 “허명의 덫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 더 아이 같고 더 어른 같은 사람이 되리라” 결심하고 자기 수련 중이다.
경계를 넘어서 도자기 그림 표면에 코팅 작업을 하든 하지 않든 그의 그림은 수수하고 질박하다. 화장 안 한 누이의 얼굴 같다. 그리고 그림 안에 공명이 있다. 하늘 위에 두둥실 뜬 달항아리, 후광을 발하며 공중에 뜬 토마토 그릇, 황톳물 들인 한지 위로 떠오른 청화백자까지 공간을 부유하며 나지막한 음을 만들어낸다. 빈 항아리를 두드릴 때 나는 공명. 그의 작품에서 초현실을 발견했다면 이 공명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을 한데 쓰기 좋아하는 그는, 토마토는 동양화 기법으로 농담을 그윽하게, 그릇과 나무판은 서양의 수채화 기법으로 물감을 겹쳐가며 그렸다. 또 자로 잰 듯한 테두리 선의 정확한 기하학은 서양화 기법이라 할 수 있고, 상감기법은 동양의 것이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 그림과 조각(잘라내고 끼워 넣는 행위를 거치므로)의 경계, 그리고 삼라만상의 경계가 그림 안에 다 있다. 그의 그림 한 조각 한 조각처럼 삼라만상은 독립된 소우주다. 그래서 그 경계가 칼로 자른 듯 날카롭지만 그것이 한데 어우러지면 또 하나의 몸이 된다. 나와 너의 경계는 엄연하지만 함께 만나 사랑하고 한몸이 되듯이. 그의 그림은 이 깊숙한 깨달음을 준다.

(위) ‘비움과 채움’, 한지・혼합 재료(상감기법), 2009


(왼쪽) ‘비움과 채움’, 한지・혼합 재료(상감기법), 2008
(오른쪽) ‘군자의 향 4호’, 한지・혼합 재료, 2009



화가 오관진 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부터 19회의 개인전, 1백여 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미술대전, 아시아 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한 동양화가로, 최근 초현실적인 화면에 우리 도자기를 재현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