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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성태훈 씨 날아라 닭, 피어라 초록 매화


(오른쪽) ‘벽으로부터의 반추 Ⅱ’, 한지에 수묵 담채, 163×131cm, 2004

눈 오고 바람 부는 한 세월 지내더니, 매화꽃 알큰하게 피었다. 알큰한 그 숨결로 세상의 남은 눈을 녹이는 매화 향, 화폭에 가득하다. 이 그림은 매화나무 아래서 청산가를 음유하던 선비의 것이리라. 한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홍매도 백매도 아닌 초록 매화다. 물론 세상엔 없는 꽃이다. 초록 매화 사이로는 닭이 날아다닌다. 날개가 퇴화돼 더 이상 날 수 없는 새, 닭이 훨훨 창공을 난다. 닭 잡아먹는 날짐승인 매가 ‘소 닭 보듯’ 닭을 지나쳐 날아간다. 이 그림 속 세상이야말로‘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인 것만 같다. 3월호 표지 작품 ‘날아라 닭Ⅵ’이다.산수 유람하듯 인생을 유람하는 이의 문인화쯤으로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본 성태훈 씨의 수묵화는 어딘가 다르다. 파격과 은유가 화폭 안에 담겨 있다. 그 뜻은 한참 읽어야 헤아릴 수 있다. “날아다니는 닭은 희망의 징표라 할 수 있어요. 닭은 예부터 벽사 邪의 의미가 담긴 상서로운 동물입니다. 홰를 치면서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알리는 희망의 전령사고요.


(왼쪽) ‘폭포 Ⅱ’, 한지에 수묵 담채, 100.5×57cm, 2007
(오른쪽) ‘봄은 온다 Ⅰ’, 한지에 수묵 담채, 209×1148cm, 2006


매화는 어떤가요. 삼동을 참아내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봄의 전령사지요. 게다가 현실에 없는 초록 매화이니 그야말로 이상향 아닌가요. 얌전해 보이는 수묵화에 제가 심은 파격은 바로 제가 소망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이 이런 초현실적 풍경, 희망의 풍경으로 바뀌길 소망합니다.”예전부터 그의 수묵화는 좀 남달랐다. 광주에서 청춘을 시작한 탓일까. 2000년대 초반에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시대를 반추하는 실경화를 그렸다. 9・11 테러 때 매스컴에 보도되는 테러 현장을 즐거운 놀이 보듯 바라보는 어린 딸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고, 그 후 테러와 폐허의 잔상들을 수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폐허의 잔해 속에 서 있는 딸 윤서를 줄기차게 그렸는데, 이는 우리 세대가 만든 폭력과 불안 속에서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함을 은유하는 것이었다. 2005년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이로 대량 살상 무기인 전투기, 항공모함이 떠다니는 모습을 수묵으로 그렸다. 매화도 위에서 중무장 헬기가 비행 시위하는 그림 에는 ‘모기’라고 제목 붙이고, 그림 아래에 “매화는 일평생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라는 글을 써 넣었다. 테러, 전쟁, 폭력, 불안…. 그의 고아한 수묵화 속에는 현대문명의 잔혹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휘둘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며 세상과 연을 끊고 난이나 치는 문인화의 주인장들과는 다르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술가는 깊은 산사만 찾아가야 할까요?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에서 살아야 하지 3않을까요? 예술가는 시대와 함께 가야 합니다. 동양철학을 배우고(동양철학 박사 과정 중이다) 동양화에 몰두하는 이유도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섭니다. 과거를 좇는 학문과 예술로 알기 쉽지만 동양철학과 동양화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깊게 하도록 해줍니다.”이렇게 세상의 이야기를 나직하게 풀어나가는 동양화가 성태훈 씨. 수묵의 서정성과 현실이라는 서사성을 담은 그의 그림 앞에서 심장이 뜨거워지는 건 이 때문이다. 2009년부터 그의 매화도엔 전투기 대신 닭과 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안과 폭력의 세계, 그 속에 사는 우리의 애환을 수묵으로 그리던 그가 마침내 다다른 ‘날아라 닭’의 세계다. 이제 그의 그림 속에는 잔뜩 주먹을 쥔 희망이 보인다. 눈 오고 바람 부는 한 세월 굳세게 지내더니 마침내 꽃을 피우는 초록 매화처럼, 세상의 어둠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건너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이 그림 속에 보인다. 퇴화됐던 날개로 다시 날아오르는 닭처럼 또 다른 한 세월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이야기에 우리도 조용히 힘을 보태 외쳐주고 싶다. 날아라 닭! 피어라 초록 매화!

(위) ‘날아라 닭 Ⅵ’, 한지에 수묵 담채, 149×210cm,

화가 성태훈 씨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자신의 그림에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자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99년부터 매년 1,2회씩 개인전을 부지런히 여는 작가로, 15회의 개인전과 20회 가까운 기획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의 입주 작가로 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